절삭공구의 역사 – 변화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우리는 인간이 단단한 물체를 나무나 돌 또는 동물 뼈를 이용하여 쓸모 있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언제부터 알았는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로 인해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페터 쾨니히스로이터(Peter Königsreuther)

핵심 내용

  • 인간은 환경을 이용하기 위해 환경을 바꿔왔다. 아주 오래전 인간은 돌을 이용하여 기존의 물체를 최적화하거나 새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 인간은 단단한 물질을 부드러운 형태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톱과 줄을 만들었다. 이들은 비교적 정밀한 절삭 공구였다.
  • 당시의 줄은 최초의 금속 가공 평삭기가 나올 때까지 최고의 금속 장인들이 수 세기 동안 줄곧 사용하는 도구였다.
  • 20세기 중반 전기 모터와 최초의 제어 시스템은 컴퓨터가 출시되면서 더욱 스마트한 절삭이 이루어졌다.

인간은 사냥이나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선사시대부터 환경을 바꿀 줄 알았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도 자연이 제공해 주는 것보다 훨씬 쓸모 있게 만들었고 끊임없이 최적화하였다. 석기 시대 장인들의 구멍 뚫기와 긁기 정도가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초의 절삭 방법이었으리라 추측한다.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최초의 돌 도구는 족히 100만 년 이전의 것이었다. 기원전 4,000년경 석기 시대에 인간들도 구멍을 뚫을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자물쇠 제조 공이 절삭공구 전문가 역할을 했다

돌 긁개는 수 세기 시간이 흐르면서 줄이라는 도구가 탄생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후의 인간은 줄을 더욱 최적화하기 위해 금속 다루는 방법을 체득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인간은 이미 불을 통제하고 있었다. 고대에는 청동으로 줄을 만들었고, 제련기술의 발달하면서 로마 시대에는 철로 만들었고, 마침내 줄에 홈까지 새겨 넣어 더욱 유용하게 만들었다. 이제 인간은 금속을 단조하거나 주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정밀하게 절삭 가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줄 뿐만 아니라 톱도 수 세기 동안 인간의 근력으로 움직이는 중요한 절삭 도구였다. 수력으로 움직이는 맷돌은 15세기가 되어서야 착안할 수 있었다. 16세기에 뉘른베르크에서는 목재로 된 바이스가 발명되었고, 곧이어 철로 만든 조가 2개인 바이스가 개발되었다. 이를 이용하여 보다 정확하고 간단하게 힘을 아끼면서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석기 시대 사람들은 나무나 사슴 뿔로 만든 관과 석영을 연마재로 사용하여 돌망치에 구멍을 뚫었다.

당시에는 널이 있는 선반, 발이나 손으로 구동되는 플라이 휠이 있는 수평 보링 기계, 수직 보링 기계가 이용되었다. 당시에 자물쇠 제조공은 절삭 전문가로 변모하였고, 줄은 그들의 손에서 최고의 정밀도를 발휘하였다. 18세기에는 이미 금속 부품을 연속 생산하기 위해 증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공장이 생겼으며, 1817년 영국인 리차드 로버츠가 줄을 대신하여 체인 드라이브를 적용한 최초의 평삭기를 만들었다. 이 평삭기는 1850년에 금속을 수동으로 평삭하는데 제곱미터 당 약 20마르크가 들었다고 한다. 이 평삭기는 그 가격을 약 9 페니히(1 페니히 = 1/100 마르크)로 낮추었고, 그로 인해 최종 제품 가격도 저렴하게 가공할 수 있었다.

세계적인 절삭공구 개발 과정

가장 중요한 절삭 공정 가운데 하나인 밀링은 기계화된 가공법으로 1818년에 미국에서 수평 밀링기 형태로 시작되었다. 2년 후 첫 트위스트 드릴이 나왔다. 1829년 헨리 모즐리를 통해 마이크로미터 캘리퍼가 탄생하였다. 이후 위드워스에게 캘리퍼 게이지와 링 게이지를 사용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1861년 Brown & Sharpe이 최초의 유니버셜 밀링기를 내놓았다. 동시에 제대로 된 첫 번째 밀링 커터가 나왔다. 이때까지도 사람들은 평평한 공작물을 가공하는 데에 줄과 같은 도구를 사용했다. 10년 후 Brown & Sharpe는 최초의 밀링 커터 연마 시스템을 만들었다. hatre 선반은 모즐리의 또 다른 아이디어를 통해 피드 샤프트를 갖게 되었다. 이 피드 샤프트 덕분에 수동 회전이 필요 없고 훨씬 더 정밀해졌다. 이는 막 싹트기 시작한 동력화를 위한 둥근 피스톤, 로드 및 튜브를 제작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되었다.

최초의 모즐리 리드 스크류 선반은 1800년 이후부터 스크류 생산에 사용되었다.

19세기 중반에는 밀링 기계, 측정 도구, 텅스텐을 함유한 경질 공구, 공작물을 위한 클램핑 시스템, 밀링 커터, 안정적인 기계를 만들기 위한 야금학적 노하우가 축적되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안정된 동력이었다.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수력이나 풍력 또는 시간 상 제한과 질적인 차이가 있는 인간과 동물의 근력은 절삭의 잠재력을 활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과 가죽 트랜스미션 벨트를 사용하여 기계가 구동되었지만, 일부 기술 역사학자에 따르면 이 시대에 증기 기관이 산업 혁명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공작 기계도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기계 구성품 제조의 정밀도가 꾸준히 증가하지 않고 새로운 금속 합금 가공 시 실행 가능성의 한계가 확장되지 않았다면, 증기 엔진은 어느 시점에서 호흡이 멈추었을 것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공작 기계의 개선이 동반되지 않았다면 특정 시점에서 효율성을 더 높일 수 없었을 것이다.

영국, 미국 그리고 프랑스에서 급격한 기계의 붐이 일어났다. 이 시기의 독일은 소국 분리주의로 인해 관세와 해상 세계 무역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어 뒤로 쳐졌다.

절삭공구 기술 발전의 길드 조직

소시민들의 비더마이어(1815 ~ 1848년 사이 독일 예술 사조)식 ‚검소함‘과 독일의 엄격한 길드 조직이 산업적 변혁을 억제하였다. 1807년과 1811년경 프로이센 개혁과 법적으로 보호되는 영업권과 결합된 길드 조직의 폐지가 점점 사고의 변화를 초래하고 자의식을 촉진하였다. 여기에 괴팅엔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요한 베크만과 같은 공상가들이 합세하였고, 이들을 학문적 원리인 ‚기술‘의 창시자로 일컬어 마땅하다. 그는 교과서와 강의를 통해 길드 마이스터들에 대한 강제적 복종이 점차 사라졌고, 자유로운 발명 정신이 오늘날까지 나래를 펼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베를린의 보르지히, 뉘른베르크의 클레트, 쾰른의 하겐 & 베렌이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계 제작자였다. 뮌헨의 Friedrich Deckel이나 쾰른-도이츠의 Alfred A. Schütte 같은 회사들이 독일 기계 엔지니어링 세계에 합류하였다.

또한 전기 드라이브가 증기 엔진을 대체했으며 고속도강은 1900년 파리 세계 박람회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러나 이 강은 보다 빠른 속도로만 가공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산업 환경에 전기화가 급속하게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에 전기 드라이브는 개별 엔진이 등장할 때까지 증기 엔진과 마찬가지로 중앙에서 트랜스미션 벨트를 통해 전기적으로 기계를 작동했다. 전기 드라이브는 당시에는 전송 중 벨트의 마찰로 인해 열로 낭비되었던 에너지의 약 50 %를 절약했다. 그로 인해 이제 고속도강으로 제작된 공구로 정밀한 금속 가공이 가능해졌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비생산 시간이 단축보다 생산 시간 단축이 공작 기계 개발의 초점이었다. 하지만 고속도강으로 인해 증가된 피드와 회전수로 인해, 이상적인 것으로 일컬어지던 Loewe 공작 기계조차도 4주 후에는 마모되었다. 기어휠이 부러지고 샤프트와 베어링이 파손되었다.

결과적으로 기계 제조업체는 시스템을 보다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전체 설계를 면밀히 검토해야 했다. 강철 휠이 지금까지의 주철 또는 철 재질의 휠을 대체하였고, 베어링 시스템과 스핀들이 강화하였다. 오일이 윤활유로서 그리스를 대체하여 기어 박스가 오일 배스에 배치되었다. 기계는 한 단계 더 강력해져 이는 다가올 20세기 대량 생산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동시에 작업자는 새로운 유형의 경영 방법을 숙고하고, 저렴하게 절삭하기 위해 능률화해야 했다. 테일러리즘은 컨베이어 벨트와 성과급 방식이 미국에서 등장했다. 독일에서는 기계를 전문화하여 필요한 능률 개선을 이루었다.

예를 들어 범용 선반은 황삭, 정삭, 드릴링, 연마 및 나사 절삭과 같은 모든 작업에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다른 생산 시스템의 용량을 늘리고 비경제적인 저부하 또는 손상을 일으키는 과부하를 피하기 위해 적용 사례에 맞춘 가공 시스템으로 변모하였다. 범용 선반에서 터릿 선반, 볼트 선반, 파팅 머신, 황삭 및 인발 선반이 파생되었다. 인발 선반은 모든 간단한 원통형 구성 요소의 생산 등에 사용되었다. 또한 공작물에서 가공 순서를 여러 워크스테이션에 분배할 수 있는 다중 스핀들 자동 선반도 있었다. 당시 Gildemeister & Comp. Aktiengesellschaft는 1901년에 공구가 한쪽 면으로 회전 시 순환하는 멀티 스핀들 머신을 개발했다.

독일이 변모하다

범용 밀링 머신과 관련하여 개발 과정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자동 베벨 기어 선반, 수직 밀링 머신, 트위스트 드릴 밀링 머신 및 릴리프 밀링 머신이 출시되었고, 웜 밀링 머신, 수평 범용 밀링 머신 그리고 다양한 페이스 밀링 시스템이 소개되었다. J. E. Reinecker의 종 방향 및 수직 밀링 머신은 이미 비교적 조작하기 쉬운 기계였다. 스핀들 속도와 이송 속도 모두 슬라이딩 휠을 사용하여 수동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Wanderer-Werke는 드라이브 샤프트가 항상 일정한 속도를 가지기 때문에 전동기 드라이브 또는 싱글 디스크 드라이브를 위해 준비된 스텝 휠 드라이브를 공작 기계에 장착하는 아이디어로 인해 존경을 받았다. 이 독일 기계 제조업체는 여러 아이디어로 유럽에서도 성공했다. 동시에 공작 기계의 수요와 수출 비중이 증가했다. 1910년에 이미 35개의 주식회사가 있었으며, 각 회사는 7천만 라이히스마르크(1924 ~ 1948년까지 쓰인 독일 통화, 약 2억 7,500만 유로, 원화로 3,550억 원에 해당) 이상의 자본에 접근할 수 있었다.

절삭공구와 기계의 경주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자재의 효율을 높이고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또다시 능률을 개선해야 했다. 이 시기에 사용법을 빠르게 익힐 수 있는 이른바 전용 기계라는 특수 기계들이 개발되었다. 다른 국가들의 기계 공학과 비교하여 독일의 기계 공학은 규격화되고 통일되어 기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시스템이 가능한 적은 수의 개별 부품으로 구성되어 일종의 모듈 시스템의 초기 모델이 그 당시에 형성되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계속 진행된 기계 퍼포먼스의 지속적인 증대로 능률이 개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군비 경쟁, 즉 기계의 성능과 절삭 재료 간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언급할 만한 것은 1926년 오스람이 최초 개발한 소결 초경합금 “Widia”이다. 이를 통해 메인 타임을 한 번 더 단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절삭 재료의 잠재력을 완전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계 개념으로 돌아가야 했다. 경화 및 연삭 기어 요소가 이에 대한 해결책이었으며, 슬라이딩 표면을 윤활해야 했다. 이로 인해 가압된 오일을 이용하는 중앙 윤활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Widia의 절삭 성능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Schiess의 대형 회전식 선반과 같은 기계를 사용하여 터빈과 선박 드라이브를 위한 대형 부품 가공도 개발되었다.

최초의 컨트롤러

1930년대 말부터 실질적인 대량 생산을 위해 다시 범용 기계를 집중적으로 사용하였지만, 경우에 따라 모듈 베이스의 특수 시스템을 제작할 수 있다는 점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기계적 경량 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탄소 섬유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부품은 아니지만, 용접 강철 구조물을 사용한 정교한 셀 구조를 통해 탄력적으로 가벼운 제조 시스템을 만들었다. 경량 주조 부품은 동적인 강성을 제공하였다. 다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기계 산업은 1차 세계 대전과 동일한 이유로 발전이 계속 이루어졌다.

1940년에 Schiess는 직경 25m, 무게 약 550t의 공작물을 위해 이 거대한 회전식 선반을 제공했다

이 시기의 문헌을 찾아보면 기계에서 중요한 개선은 템플릿을 사용하여 비교적 복잡한 윤곽을 재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제어 시스템이라고 쓰였다. 형상을 공작물에 적용하기 위해 센서로 모델을 스캔할 수 있는 형판 또는 견본이 있는 기계가 이 시기에 이미 있었다. 하지만 Nube 카피 밀링 머신은 AEG의 이른바 Eltas 컨트롤을 장착한 새로운 기계였다. 그 이후로 전자 및 기계 공학은 필연적으로 손을 맞잡고 미래의 기계 개발을 위한 혁신적인 단계를 밟아왔다. 센서 제어 시스템은 대량 생산에서 숙련된 작업자의 작업을 넘겨받아 자동화를 완성하였다. 2차 세계 대전 말엽의 목표는 자동화, 쉬운 조작성, 전기 컨트롤 시스템 등이었다.

신생 독일 연방 공화국은 많은 이들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복구되었고, 기계 제조업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들은 1950년대를 자동화된 공작 기계에서 자동화된 제조 공정으로의 전환 단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변혁을 특징짓는, 오늘날 잘 알려진 가치 창출 체인과 유사하게 이 흐름 원리는 창고에서 납품까지 개별적인 생산 시스템과 운반 시스템들이 시간 상 서로 조율된 작업 시퀀스가 생성되었다. 또한 절삭 기계는 저렴하게 제작하기 위해 점점 표준 요소를 채택하였다. 공장에서는 운반 라인이 개발되었다. 1965년까지는 견고한 체인이 우세하였다. 생산 체인에서 가장 긴 단계를 통해 생산 사이클이 작업을 좌우했다. 따라서 하나의 시스템이 고장이 나면 전체 시퀀스가 중지된다는 것이 단점이 있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은 이 기간 동안 제조 공정 개발에 큰 역할을 했다. 흐름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어였다.

디지털 절삭

주파수 패턴이 벨트 제어 펄스에 대한 음향으로 표시되는 아날로그 컨트롤 시스템을 이용한 실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이 결함은 숫자 기반 NC 제어를 촉진하게 되였고, 이는 응용 유연성으로 인해 큰 점수를 받았다. 향상된 컴퓨터 성능 덕분에 공구 경로에서 점점 더 많은 포인트를 빠르게 계산하여 기계 축으로 전송할 수 있었다. 첫 번째 NC 제어는 펀치 카드에 움직임 데이터를 인코딩하여 당시 디지털 컴퓨터라고 부르던 컴퓨터로 제어되었다. 수치 제어는 기계와 공구의 가능성을 더 잘 활용할 수 있었다. 기계는 새로운 성능 수준에 맞게 조정되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일반적인 공작 기계가 저렴했고 NC 기계의 납기가 길고 프로그래밍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 돌파구를 찾는 작업은 계속되었다. Waldrich Siegen은 당시의 NC 기계 제조업체 중 하나였다. Waldrich Siegen가 당시 제작한 기계는 AEG 경로 제어 기능이 있는 Numeromat 롤러 교정 선반이었다. 1970년 지멘스는 NC 시스템을 발표했고 당시 많은 기계 제작업체들은 이 시스템을 자사 기계에 통합하였다. 1976년 Siemens와 Fanuc는 CNC Sinumerik 7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출시했다. CNC 공작 기계의 놀라운 행진이 이 시기에 시작된 것이다.

Siemens의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사용한 최초의 Sinumerik 컨트롤 중 하나는 1970년대 밀링 머신을 NC 머시닝 시스템으로 바꾸었다.

기계 공학에 혁명을 가져온 컴퓨터화는 오늘날의 디지털화의 기초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공작 기계는 적층 가공을 위해 레이저 및 시스템과 결합된다. 머시닝 센터는 오늘날 터닝과 밀링 작업을 수행할 수 있으며, 공구를 자동으로 픽업, 삽입하거나 수십 개의 공구를 수용할 수 있는 자동 매거진에 다시 넣을 수 있다. 머시닝 센터는 레이저로 도구의 상태를 확인하고 로봇의 생산성을 향상시킨다. 소량 시리즈와 개별 아이템의 생산을 자동화하기도 했다. 소량 시리즈와 개별 아이템은 최근까지 비경제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Fanuc은 전기 및 전자유압식 스테퍼 모터로 컴퓨터화와 동시에 그다음 혁명을 일으켰다. 이 드라이브를 사용하면 기계 축의 위치를 훨씬 정확하게 제어할 수 있다.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전자 기기 및 센서도 더욱 강력해지고 하드웨어는 작아졌다. 이후 기계 프로세스의 시각화가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흑백 브라운관을 사용하였지만, 오늘날은 컬러로 묘사되고, 가공을 시작하기 전에 애니메이션을 통해 프로그램이 정상인지 아니면 충돌이 발생하는지 미리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은 기계를 가동하기 위해 기계 앞에 서 있을 필요가 없다. Cloud & Co는 전 세계 거의 모든 언어로 태블릿 PC나 스마트폰을 통해 이를 가능하게 한다. 많은 표준 프로세스가 제어 데이터 레코드에 완벽한 프로세스로 포함되어 있다. 기계와 전자 장치 (소프트웨어 포함)는 공장을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모든 것이 자동으로 실행된다. 관련 제조 시스템, 심지어 제품까지도 자체 최적화를 위해 서로 통신한다.

쓸데없는 혁신 공포증

인간이 이러한 낙원을 계속 유지할지 아니면 스스로 없애버릴지 두고 봐야 한다. 일자리 때문에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마디 한다면, 비관적으로 생각되던 모든 격변 시대에도 항상 새로운 일자리는 새롭게 창출되었다. 오늘날의 스마트 공작 기계와 마찬가지로 작업자들도 유연해야 한다. “지능형” 기술과 달리 인간은 창의력에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돌도끼로 이를 증명했던 적이 있었다.